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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기사

'낭만의 화신' 이해명을 아십니까

 

유려하게 흐르던 해명의 앞머리는 어디로 갔나?
구정 전에 잘랐다. 장가도 갔으니까 장인 장모께 인사드려야 하는데, 그 꼴로 갈 순 없잖나?
그 머리에 한복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데…. 자를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나?
아깝긴! 후련했지. 촬영 시작하기 몇 달 전부터 '그 모양'이었으니까. 거의 6개월을 '그 모양'으로 살았다.
헤어스타일에 관한 아이디어는 정지우 감독이 낸 건가?
감독님과 헤어스타일리스트가 상의해서 만든 거다. 백석 시인의 스타일리시함을 추구한 거지. 시대극이면 당연히 '올백'을 할 줄 알았는데, 그건 너무 전형적이고 보편적이라 재미가 없더라. 이상한 게, 시간이 흐를수록 해명의 뽀글 머리에 '전염'이 됐다. 연기할 때 헤어스타일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된 건 처음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그 머리가 죽을 만큼 싫었으니까.
죽을 만큼?
그렇다. 죽을 만큼. 머리도 머리지만 의상도 부담스러웠다. 일단 눈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 세니까. 이게 내 마지막 작품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고.(웃음)
배우의 개인적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나?
내 의견? 전~혀 반영 안됐다. 사실 내가 별다른 의견을 내지도 않았고.
죽을 만큼 싫었다면서….
그래도 감독님을 믿었다. 믿어야 했고. 분명히 충분한 계기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믿고 또 믿었다.
그런 맹목적 신뢰는 감독과 배우 사이의 끈끈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건가?
뭐, 그렇지. 감독님과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두 사람이다>라는 작품을 함께 하려고도 했고. 그 당시에 준비를 많이 했으니까. 그게 인연이 돼서 믿고 따라가게 됐다. 하려다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에서 다시 새롭게 출발하게 된 셈이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이해명은 내 거야'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주변 사람들이 해명 역에 어울리는 배우로 나를 콕 집었다고. 하지만 배우 입장에선 그런 말이 부담스럽다. 다들 "네가 하면 어울릴 것 같다"고 하지만,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주는 건 아니니까. 해명은 내가 기존에 연기했던 배역들의 이미지를 활용하되, 그것들을 두루 섭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해명은 스스로를 '낭만의 화신'이라 칭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욕망의 화신'에 가깝다.
아무래도 욕망의 부분이 크지. 하지만 그의 욕망은 남들이 말하는 욕망과는 조금 다르다. 애가 좀 밝고 '쌍콤'하잖아?(웃음) 해명은 뭐랄까… 감정이 '쏠리는' 대상에 굉장히 몰입하는 타입이다. 조난실(김혜수)이라는 대상을 향한 그의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바로 이 영화를 밀고 나가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조난실에게 '쏠리는' 해명의 감정을 과연 순수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첫사랑에 대한 집착도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은데.
집착이라는 감정이 가장 강하긴 하지. 그래서 그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고.
초반부의 해명과 후반부의 해명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명도 성장통을 겪으니까. 그 성장통이 없었다면 <모던보이>는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에 그쳤을 수도 있다. 분명 시대적 목적도 있는 작품인데 말이지. 사실, 그런 목적이 없었다면 영화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모던보이>를 해명의 성장 드라마이자 젊은이들의 방황을 다룬 청춘영화로 볼 수도 있겠다. 사실 <와이키키 브라더스>(01)나 <질투는 나의 힘>(02) 등의 전작에서 당신은 잿빛의 '어두운 청춘'이었지 않나. <모던보이>에서는 청춘이 짊어진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낸 것 같다.
이전의 내 모습이 잿빛에 가까웠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한없이 해맑던 아이가 점점 점잖아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대적 분위기도 그렇고. 발칙하기만 했던 이해명이 여러 난관을 겪으면서 새로운 '정서'가 축적되는 과정에 관한 영화인 거지. 지나치게 주관적이었던 해명이 점차 객관적인 시각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니까.
어쨌거나 해명은 복을 타고난 사람이다. 어려운 시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걸 누리며 사니까.
맞다. 태어나서 이렇게 부유한 역할은 처음인 것 같다.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웃음)
<극락도 살인사건>(07) 때 주인공 제우성에 대한 감상을 물었더니 "이렇게 지적인 역할은 처음"이라고 대답했던 것 기억하나? 지적이고 부유한 것에 대한 목마름은 왜 그렇게 강한가.(웃음)
음. 그건 뭐 일종의 '한'이지. 으하하! 만약 해명이 빈민의 1퍼센트였다면 사고 자체가 지금과 아주 달랐을 거다. 예를 들어 <질투는 나의 힘>의 이원상이 1930년대 경성에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처절해 보이겠나.(웃음) 캐릭터가 지닌 배경이 그 사람의 행동이나 가치관을 상당 부분 설명해주는 것 같다.


생경하면서도 흥미진진한 1937년 경성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인 첫 대본 리딩의 분위기는 어땠나.
처음부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이건 감독님의 힘 때문인가? 캐릭터에 어울릴 법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데,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엇비슷했거든.
구체적으로 어떤 '기운'을 말하는 건가?
차분하고 조용하지만 함께 있으면 뭔가 하나로 묶이는 것 같은, 그런 기운. 이질적이거나 낯선 느낌은 전혀 없었다. 현장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진중함 속에 자유로움이 흐르는, 묘하게 매력적이면서도 아주 편안한 분위기였다.
감독과는 캐릭터의 톤을 잡는 것에 대해 많이 상의하는 편인가?
감독님과 현장에 가기 전에 대화를 많이 한다. 시대를 재현하는 부분이 아무래도 민감하니까, 감독님은 아마 시간적 부담을 많이 느끼셨을 거다. 촬영 전에 친분을 쌓아서 감독과 배우 사이의 소통이 원활해져야 현장에서 애로 사항이 적어진다.
시대극은 처음이다. 배우 입장에서 어떤 감흥이 생기던가?
해명이라는 인물 자체가 21세기의 청년과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연기하면서 현대극과의 차이점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 캐릭터니까.
그래도 1930년대 경성이라는 도시가 지닌 고유한 색채가 생경하게 다가오진 않았나?
그렇지. 도시의 모습은 분명 새롭고 흥미로웠다. 현장에서는 '여기엔 이런 건물이 생기고, 저기엔 이런 집들이 들어서겠지' 상상하며 블루 스크린에 의존해서 연기를 해야 했다. 나중에 완성된 편집본을 보니까 컴퓨터그래픽으로 경성의 배경을 완벽하게 재현했더라. 이런 건 정말,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경이로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괴물>(06) 때도 컴퓨터그래픽의 경이로움을 몸소 체험하지 않았나.
<괴물>의 컴퓨터그래픽이 동적이었다면, <모던보이>는 정적이면서도 정말 감쪽같다. 막상 보면 이게 컴퓨터그래픽인지 아닌지 헷갈릴 만큼 진짜와 똑같거든. 예를 들어 동대문을 촬영한다고 하면, 그 주변으로 펼쳐진 가옥들이 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채워지는 거다. 배우로서도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해명이 제아무리 시대상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이라고 해도, 경성의 '모던보이' 아닌가. 일본어와 댄스 등 배워야 할 게 많았을 것 같다.
일본어는 뭐 한두 마디 하는 정도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댄스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는 (김)혜수 선배가 고생했지. 나는 전문 댄서처럼 잘 추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못 추려고 노력해야 했다. 이번 기회에 몸을 좀 유연하게 만들어볼까 했더니, 스태프들이 춤 좀 그만 추라고 말리더라.(웃음) 약간은 어설퍼 보여야 한다나? 내가 또 예전에 춤을 좀 췄는데 말이지….
춤을? 언제?
중학교 때. 그때 듀스가 한창 유행이었거든. '나를 돌아봐' 틀어놓고 브레이크댄스 추고 그랬지. 그때 췄던 가닥이 있어서 배우면 또 금방 따라할 텐데. 으하하!
현장에서 화제의 '회오리 댄스'를 출 때 민망하진 않았나? 혹시 배우에게 너무 실례되는 질문인가?
아니 뭐, 그 장면에서 중요한 건 댄스의 스킬보다는 해명의 감정 표현이니까, 크게 부담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능수능란한 동작을 배제하려 애썼지.(웃음) 근데, 한 번에 오케이가 나지는 않더라고?


모던보이의 속사정

<모던보이>는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에 이어 원 톱으로 등장하는 두 번째 영화다. <극락도 살인사건>의 성공이 <모던보이>를 선뜻 택하게 만든 계기를 마련해줬을 것 같다.
<극락도 살인사건>을 촬영할 때 섬에 몇 개월간 갇혀 지내면서 배우가 내적으로 품어야 하는 책임감에 대해 배웠다. 그런 경험이 <모던보이>를 하면서도 자양분으로 작용했지. 스태프들, 감독님과의 소통이 좀 더 원활해진 것 같다. 나 자신도 예전보다 덜 산만해진 것 같고. 예전엔 지금보다 더 두서가 없었지 아마?(웃음)
<괴물>처럼 가족 구성원의 일원으로 등장할 때와 <극락도 살인사건>이나 <모던보이>처럼 작품의 축을 이끌어가야 하는 최선봉에 섰을 때, 배우로서 어떤 차이점이 있나?
<괴물>의 남일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는 캐릭터니까, 기본적으로 나를 제외한 다른 문제들이 '남 일'처럼 보여도 절대 놓쳐선 안 될 '끈'이 있었다. 반면 <극락도 살인사건>이나 <모던보이>에서는 나에게 한 학급을 책임져야 하는 반장의 역할의 주어진 거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출연 분량이라는 건 사실 배우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모던보이>가 어느덧 열한 번째 작품이다. 데뷔 때와 비교해서 스스로 가장 많이 변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아까 봐서 알겠지만, 사진을 촬영하는 테크닉이 많이 늘었다.(웃음)
음… 그것도 기복이 꽤 심한 것 같던데?



그런가? 그래도 전보다 꽤 나아지지 않았나? 으하하!

<질투는 나의 힘> 인터뷰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장족의 발전을 한 것 같긴 하다.(웃음)
예전엔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그건 보는 사람들도 다 느끼더라고. 나부터 편해지려고 노력해야지.

당신에게도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나?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거.
물론 있지.

이를테면? 사소한 습관도 좋고, 본질에 대한 것도 좋다.
본질과 습관은 어쩌면 같은 게 아닐까? 내 고민은 그거다. 좀 더 나은 변화가 있었으면 하는 것. 나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무엇을 향해 꾸준히 달려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다. 부질없어 보이는 건 싫으니까.
연기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이제는 구력이 쌓일 시기일 것 같은데.
구력? 에이, 그런 개념은 없었으면 한다. 나는 항상 '전무'의 상태에서 새로운 작품, 새로운 연기를 하고 싶다. 그게 배우의 기본적인 욕심 아닐까? 기존의 '때 묻음'이 다시 나오면, 개인적으로는 아쉽지. 뭔가 하다가 만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때 묻음'이라는 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 않나. 연기의 토양이 될 수도 있는 건데.
나쁜 건 아니지. 다만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으면 하는 거다. 기존의 '때 묻음'을 활용하더라도, 그게 너무 빤히 보이는 건 싫다. 하려면 티 안 나게, 잘 해야지.
유치한 질문 하나만 하자. 연기가 재밌나? 좀 더러운 비유긴 한데, 당신의 연기를 보면 술에 취해서 구토할 때처럼 나 자신도 제어할 수 없이 왈칵 쏟아지는 뭔가가 느껴진다.
음. 많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술 먹고 구토할 때처럼 왈칵 쏟아지는 연기'라니, 제발 그렇게 하고 싶다.(웃음) 리허설을 할 때나 촬영을 할 때, 오케이가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손을 놓고 나불나불거릴 때가 있다. 대선배님들은 그런 순간을 '접신'이라고 하는데, 그런 건 보는 사람들도 '아, 이 장면은 정말 위대하다'라고 느끼는 거지. 나도 그 경지를 목표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셈이다. 아, 너무 겸손한 척 했나?(웃음)
1년에 한두 편씩 꾸준히 작품을 하고 있다. 이건 동년배 배우들이 정말 부러워할 만한 일이다. 의도적인 공백이 없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굳이 쉴 필요는 없잖나? 물리적으로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쉬어야겠지만. 아직까진 다행히 그런 상황이 온 것 같진 않다.
수많은 배우들이 재충전을 이유로 몇 년씩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추곤 하지 않나. 그것이 연기라는 예술을 하는 배우들이 지닌 미덕이자 특권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음…. 인연이 닿아서 계속 작품을 하고 있긴 한데, 나도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 몸과 마음이 움직여주면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할 수도 있고. 사람의 앞날은, 언제나 그렇듯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거다.(웃음)
요즘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성공한 배우들이 연기의 고향인 연극 무대로 잠시 '외출'을 하는 것이 하나의 추세다. 당신의 고향도 무대인데, 혹시 고향이 그립진 않나?
그립긴 그립지. 그리운 건 사실인데, 어떻게든 한 작품을 하려면 1년 정도는 쉬어야 할 것 같다. 어떤 작품이든지 긴급 투입되기엔 내가 너무 버겁거든. 연극이 잠깐 '외도'하듯이 뛰어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심이 생기면 기존의 것을 다 털어내고 뛰어들어서 새롭게 적응해야 한다.
마지막 질문. 원더걸스의 소희가 당신을 이상형으로 꼽은 것에 대해 알고 있나?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알지. 왜 모르나.(웃음)

기분이 어땠나?

난 왠지 그 친구가 걱정스럽던데? 으하하! ?

촬영을 할 때, 오케이가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손을 놓고 나불나불거릴 때가 있다. 그런 건 보는 사람들도 '아, 이 장면은 정말 위대하다'라고 느끼는 거지. 나도 그 경지를 목표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셈이다.
이전의 내 모습이 잿빛에 가까웠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한없이 해맑던 아이가 점점 점잖아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시대적 분위기도 그렇고. 해명이 점차 객관적인 시각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