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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기사

시대와 개인의 아픔을 간직한- <모던보이>의 박해일, 김혜수 2008.09.29


어색하게 만나 아쉬운 작별을 고한 모던보이

풍성한 곱슬머리와 하얀 나비넥타이가 웬 말. 1930년대의 모던보이 이해명으로 분한 포스터 속 박해일은 한마디로 비호감스러운 외모였다. 시대극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로 꼽고 싶은 박해일이지만, 눈에 익숙지 않은 외형은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게 했던 것도 사실. 하지만 누구보다 고민했던 사람은 박해일 본인이었다. 그는 솔직히 해명의 외적인 모습이 영화와 캐릭터 설정에 있어 역효과를 내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처음 파마하고 의상을 입었을 때는 정말 가관이었어요. 너무 안 어울린다는 생각 때문에 적응이 안 되서 걱정부터 앞섰죠.” 박해일은 불편한 옷을 입은 것 마냥, 다소 어색하게 해명을 만났다.

해명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동떨어진 채, 스스로를 ‘낭만의 화신’이라 칭하며 유쾌하게 인생을 즐기는 철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모던걸 조난실에게 반해 지독한 사랑에 몸을 던지고, 여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거는 무모함을 저지르고 마는 인물이었다. 허나 일본인이 되고 싶었다는 어릴 적 꿈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해명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적극적이기에 미워할 수만은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첫 눈에 반한 조난실을 찾아 끝까지 좇는 것처럼, 본인의 감정이 끌리는 것에 있어서 굉장히 집착한다는 것이 해명의 매력이에요. 정말 이상한 놈이죠.” 박해일은 정지우 감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던보이>를 선택했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며 조금씩 ‘이상한 놈’ 해명에게 매혹되기 시작했다.

 


박해일은 겁이 났다. “작품에 참여할 때 시나리오를 보고 부담감과 책임감이 동시에 들었어요. <살인의 추억>처럼 지금까지 다른 영화에서는 인물의 한 면을 부각시키면 됐는데, 해명은 굉장히 다이내믹한 인물이라 태도를 명확하게 가져야했어요.”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시작으로 그는 연기경력에 비해 비교적 많은 작품의 흔적이 보이는 배우였다. 그에게 <모던보이>는 자신의 연기 경험을 십분 활용할 기회였다. 향락과 퇴폐에 빠진 한량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지고지순한 해명은 극단적이지 않고 다채롭게 변화하는 인물이기에 지금까지 박해일이 분한 인물들의 집합체인 셈이었다.

시대적 배경과 인물의 감정의 균형을 깨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는 정지우 감독의 말처럼, 배우들도 특수한 상황에 놓인 캐릭터들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해명이 죽을 각오로 난실을 대신해 단상 앞으로 다가가는 장면은 시대적 상황에 비추었을 때 심각해야 마땅했지만,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해명의 행동과 표정은 무거움과 가벼움의 중도를 지키며 관객들의 긴장감을 희석시켰다. 객석에서 짧은 웃음이 들려오기도 했던 이 슬픈 장면은 박해일 나름의 고민을 담은 신이었다.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지만 조금 코믹하게 연기했어요. 너무 심각하다보면 도가 지나쳐서 관객들의 감정이 깨질 수 있잖아요. 감독님도 제가 그렇게 연기하는데 놔두시더라고요.” 연방 “쉽지 않았어요”라고 답하는 박해일은, 감독은 물론 배우에게도 193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약이자 독이 될 수 있는 날카로운 칼날이었음을 넌지시 드러냈다.

 


이해명과 조난실의 관계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더욱 끈질기고 지독한 관계를 낳았다. 그는 현재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당시의 인물을 연구하기 위해 영화보기를 택했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에서 1930년대에 제작된 영화 <미몽>을 본 그는 마치 굉장한 발견을 한 것처럼 설렜다. “그 당시 배우들의 연기가 지금 우리가 보는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그 때 그 시절 연기는 저렇구나가 아니었어요. 굉장히 사실적이었어요.” 그는 <모던보이>의 원작을 읽지 않았다. 작품을 위해 한 번쯤 소설책을 폈을 법도 하지만, 그는 원작의 틀을 깨고 최대한 시나리오에 충실하고 싶은 마음으로 원작을 멀리했다. “당시에는 제 나름의 해명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이제 영화가 개봉하니까 원작을 읽어봐야죠.” 원작보다는 정지우 감독과의 대화로 캐릭터를 보완했다는 그는, 꽤나 박해일표 해명에 욕심을 보였다.

크랭크업 이후 반년을 숨겨두다 드디어 관객 앞에 정체를 드러낸 <모던보이>는 완벽한 경성의 재현만큼이나 해명과 난실의 감정을 섬세하게 좇는 영화다. “아쉬운 게 없다면 거짓말이죠.” 영화가 개봉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동안 해명을 그렸던 박해일은 채우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있는 듯했다. 그것은 해명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아쉬움일 수도, 혹은 해명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일 수도 있다. 관객들의 품으로 해명을 보낸 박해일은, 조용히 준비했던 해명과의 작별을 시작하고 있었다.

인터뷰, 정리_김민정 a149003@jocyine.com

 








감정의 여운이 남긴 눈물로 써내려간 모던걸
<모던보이>의 촬영이 끝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김혜수는 영화를 보며 눈물이 났다. 그녀가 연기한 조난실에 대한 여운보다는 영화를 통해 거친 여러 감정의 여운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모던보이>는 원작소설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와는 많이 다른 형태의 영화다. 결말부를 비롯해 전혀 성격이 달랐다. 시나리오의 결말부로 인해 조난실이라는 캐릭터도 달라져야만 했다. 김혜수는 시나리오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었다. “원작을 정말 재밌게 봤어요. 지나치게 엄격하고 획일화된 강요로 인해 그렇게 받아들여만했던 시대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고 인물들을 그려나갔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특히 조난실보다 이해명이라는 현실감 없는 인물이 느끼는 감정, 정서, 행위들이 기가막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영화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원작에서의 재기발랄한 발칙함, 그 시대에 감히 범접할 수 없었던 기운들. 그런 것들이 영화 속에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핵심적인 기운은 많이 달랐다.

원작에서의 조난실은 자체가 묘연한 여자였다. 영화에서의 조난실은 묘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필요에 의해서 묘연한 거였고, 필요에 의해서 선택적인 팔색조였다. 게다가 감정이 분명한 것도 아니었다. 해명에 대한 난실의 감정을 관객들이 눈치 채는 순간보다 영화 속에서 해명은 더 늦게 눈치 챈다. 그녀는 관객보다 해명에게 보여주는 감정으로 연기를 해야 했다. 따라서 알고 있지만 가려야하는 부분이 있었고, 그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단지 원작에서와 다른 건 조난실의 진정이 좀 더 담겼다는 것, 그것이었다.

 

필요에 의해, 목적에 의해 해명 앞에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난실이었지만, 어느 순간 감정을 숨기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난투극을 벌이고 만취상태로 노래를 들을 때, 해명은 난실에게 왜 일본말로 노래를 하냐고 물었다. 사실, 일본말로 노래를 한 것은 이시다 요코였다. 난실은 굳이 레코드판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 해명의 귓가에 한국말로 노래를 불러줬다. 그것이 조난실의 진심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철없는 남자를 자꾸 좋아하게 되는 현실, 사실 이런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되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법이었다. 독한 마음을 먹고 통제하려하지만, 맹목적인 해명의 사랑이 진심어린 순도로 느껴질 때는 난실도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끊임없이 당신 앞에서 위장을 하지만, 한편으론 난 이런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제발 알아달라는 난실의 진심어린 외침이 그녀의 귓가에는 들리는 듯했다.

“술을 조금씩 먹고 연기를 했어요. 해일 씨는 좀 많이 먹었고요. 그런 권유가 있어서 상호 동의하에 한 거죠. 취기를 가지고 연기한 것은 처음이었어요. 내가 취해본 적이 없으니까 취해서 실수하거나, 그래서 촬영에 누가되거나, 혹시 캐릭터를 잊어버리거나, 이런 이상한 상황이 올까봐 두려웠죠. 그런데 그렇게는 안 되더라고요. ‘왜 그 실력으로 무대 뒤에서 노래를 해’라고 물어볼 때, 조금 취한 상태에서 ‘일본말로 노래를 하기가 싫어서’라고 말은 그렇게 횡설수설 나오는데 마음속에서는 진짜 울컥 하던데요.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진짜 울컥하더라고요. 그렇게 찍었어요.”

 


조난실의 진심은 노래에서도 전해져야했다. 기계적인 효과들을 덧대는 것보다 조난실의 감정으로 노래를 해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대에 서는 곡은 사실 소화하기 어려운 노래였다. 하지만 노래의 분위기와 실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태도가 조난실과 너무 잘 매치가 됐기에 감독도, 음악감독도, 그리고 김혜수 본인도 무리인 것을 알지만 욕심을 냈다. 최대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기로. 재즈가수 웅산이 트레이닝을 해줬지만, 노래의 디테일은 개입하지 않았다. 재즈가수로서 기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은 조난실이 자신의 재능에 도취된 상황이었다. 그녀는 김혜수의 재능이 아니라 조난실의 재능을 갖춘 여자여야 했다. 그리고 조난실은 재능 있는 사람이었기에 최소한의 그 재능을 그녀 또한 갖춰야했다. 그녀는 조난실의 입장에서 느낀 감정들로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조난실을 연기하면서 그녀가 생각하고 예상했던 초반의 감정과는 달라진, 그런 정서가 담긴 노래였다.

“‘개여울’ 노래는 한국어 버전과 일본어 버전이 있잖아요. 한국인 조난실이 일본 대중스타의 커튼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일본 스타는 자기 실력인양 뽐내며 립싱크로 입만 벙긋거리고, 관객들은 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죠. 그 노래의 가사는 소월 시인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거예요. 일본 최고의 스타가 그 노래를 립싱크 한다는 설정, 그 정서의 주인공은 정작 무대 뒤에 있는 한국인이라는 설정이 많은 걸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영화는 소품하나, 분장하나, 의상하나, CG하나... 다 그렇게 의미를 두고 작업한 거 같아요.”

춤, 노래 등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팔색조 캐릭터. 영화를 보기 전, 모던걸 조난실은 관객들에게 이런 화려한 외형들로 인식되기 쉽다. 허나 시대와 개인의 절절한 아픔을 간직한 조난실의 내면은 배우 김혜수가 만들어낸 감정의 굴곡을 통해 원작과는 다른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렇게 김혜수가 흘린 눈물로 인해, 조난실은 비로소 시대를 넘어 우리 곁으로 다가와 긴 여운으로 간직될 것이다.

인터뷰, 정리_서정환 ppalma@jocyine.com


*사진_최성열 tjddufchl@joycin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