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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기사

[인터뷰] 오래도록 사랑 받을 배우 <극락도 살인사건>의 박해일



충무로에서 선한 눈빛을 가진 배우 중의 하나로 꼽히는 배우 박해일이 미스터리 추리극 <극락도 살인사건>으로 관객을 다시 찾아온다. 끊임없는 연기변신으로 신뢰감을 더해가는 배우 박해일은 <극락도 살인사건>에서 연쇄 살인이라는 광기에 휩싸인 섬마을에서 죽음에 맞서는 보건소장으로 분해 열연을 펼쳤다.

박해일은 말수가 별로 없지만 상대방으로 하여금 오랜 사이인 양 친숙함을 느끼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연기가 천직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시켜주는 데까지는 할 예정이에요.” 시간이 흘러도 자신감을 잃지 않는 진짜 멋진 배우로 우리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변할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배우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20년 후가 기대된다.

아동극 - 박해일은 뒤늦게 발등에 불이 붙은 케이스다.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도 연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전공을 영문학으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해일에게 연기자는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도 없었고, 존경하는 배우도 없었다. 노래와 기타연주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턱걸이로 들어간 대학교에서도 그의 방황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르바이트의 하나로 아동극 무대에 서게 됐다. 그런데 그 일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자신의 연기에 즉각 즉각 반응하는 아이들의 반응에 ‘희열’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어요.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해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에게는 노래와 기타연주가 그런 것 같아요.” 
 

미스터리 추리극 - 미스터리 추리극을 표방하고 있는 <극락도 살인사건>은 17명이 사는 작은 섬 극락도에서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극중에서 박해일이 맡은 역할은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발휘하여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보건소장이다. 연쇄 살인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 해결에 앞장서지만 첫 번째 살인사건 당시 알리바이가 없고, 다른 사람들은 반년이면 떠난다는 섬마을을 2년째 지키고 있는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첫 번째 용의자로 지목된다.

“평소 추리물을 즐겨보는 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극락도 살인사건> 시나리오는 다음 장이 궁금해지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었어요.” 박해일은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보았을 때 ‘재밌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김한민 감독이 작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듣고 나서야 출연을 결정할 수 있었다.

 

범인을 알고 봐도 재미있다 - 박해일은 만일 <극락도 살인사건>이 단순히 범인을 밝혀내는 데만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유주얼 서스펙트> 같은 영화들은 결말을 알고 보면 입장료를 환불 받고 싶을 정도로 재미가 반감되잖아요. 저희 영화는 달라요(웃음).” 범인이 찾아가는 추리극 요소가 극의 중심에 서 있지만 <극락도 살인사건>은 용의자가 밝혀지는 순간 또 다른 이야기를 준비해 관객의 시선을 확실하게 붙든다. “관객들을 위한 애프터서비스가 준비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범인을 알아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신혼의 달콤한 꿈을 버리다 - 박해일은 스스로를 달달 볶는 편이다. 사랑도 성실하게 했다. 오직 한 사람한테 오랜 시간 사랑의 감정을 담아 표현했다. 대학시절 만난 부인은 4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문제는 신혼의 달콤한 꿈에 빠져도 시간이 모자랄 판국에 박해일이 섬 생활을 자청하고 나섰다는 데 있었다. 다른 부인 같으면 그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서로의 시스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어요. 속으로는 저를 원망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에요.(웃음)”
 



박해일이 슬럼프에 대처하는 방법 - 슬럼프를 겪지 않는 배우는 없다. 배우가 슬럼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 있다. 슬럼프에 대응하는 방식이 남다른 박해일은 수시로 찾아오는 슬럼프를 ‘독’이 아닌 ‘약’으로 대했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 떨쳐버리기 보다는 받아들이는 쪽에 속해요. 다음에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슬럼프에 빠졌다고 좌절하거나 몸부림치지는 않아요. 내 상황이 현재 이렇구나 인지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죠.”

 

추리물에 잘 어울리는 감독 - 박해일이 바라보는 김한민 감독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추리물에 잘 어울리는 분이에요. 배우들과 이야기할 때 많이 들어주시는 편이고요. 배우가 궁금해 하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나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시죠.”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극락도 살인사건>은 김한민 감독이 80년대 후반 들은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재구성한 영화다. 마을 지인을 통해 들었다는 이 이야기는 ‘어떤 섬에서 12명 정도 되는 주민이 살인사건의 흔적만 남긴 채 한 구의 시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극락도 살인사건>의 경우 시나리오가 가지고 있는 느낌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어요. 드라마에 해가 될 수 있는 즉흥적인 애드립은 아예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배우들의 개인기가 사족이 될 수 영화거든요.” 박해일은 주어진 캐릭터를 표현할 때 감독의 의견을 많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최대한 수용하려고 노력하는 배우다.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들이 감독의 생각에서 나올 때 그는 자신이 연기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다. “제가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늘 가장 중요한 참고서가 되는 분들은 감독님이었어요.”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영화 - 박해일은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작품을 통해서 관객과 소통하고 싶은 배우 박해일은 단순히 웃고 즐기는 영화는 질색한다. “<극락도 살인사건>이 관객들에게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작품에 참여한 이유가 명확하게 보이는 영화’로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출연한 배우로서 감히 말하지만 규격화된 한 가지 반응만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관객 수만큼 다양한 의견이 나올 것 같아요.”

섬에서 찍고 싶지는 않았어요 - 날씨로 인해 교통과 통신이 두절,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섬 ‘극락도’는 사건의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는 제3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제작진은 극락도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곳을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곳곳을 이 잡듯이 뒤졌다. 처음에는 일부 배우와 스탭 사이에서 섬이 아닌 곳에서 촬영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섬에서 촬영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어려움을 미리 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한민 감독의 생각은 단호했다.

“김한민 감독님은 ‘가거도’가 아니면 ‘극락도’스러운 분위기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육지에서 섬까지 들어가려면 4시간 이상 배를 타야 하는데 첫날부터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요. 섬 생활이 주는 낭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요(웃음). 배우나 스탭들의 고생은 말로 다 못하지만, 영화를 보는 분들에게는 ‘우리나라에 저런 섬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공간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섬 생활을 이겨내는 그들만의 방법 - <살인의 추억> 이후 4년 만에 스릴러 장르에 도전한 박해일은 드라마 자체가 하나의 끈처럼 연결되어 있는 <극락도 살인사건>이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기를 바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보건소장 역을 연기하며 자기 안의 열정을 재확인했다. 언제나 관객의 기대보다 한 발 앞서 나갔던 박해일은 박해일만의 연기가 아닌, 박해일식의 연기를 보여주고자 한다. 박해일식의 연기란 그가 맡은 캐릭터에 몰두하는 것이다. “제가 연기하면서 느꼈던 감정의 진폭을 관객들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질 때도 많았지만 제 역량 안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어요. 고립감과 외로움이 밀려올 수밖에 없는 섬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배우들간의 의기투합은 필수였고요.”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 - 박해일은 단 한번도 다른 사람의 연기를 모방하려고 한 적이 없다. <극락도 살인사건>에서도 그의 연기관은 변하지 않았다. 보건 소장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역할모델을 따로 두지 않은 것이다. 감독을 통해서 캐릭터가 지녀야 할 것들을 찾아가는 박해일은 현장에서 연기의 모든 것을 배웠다. “집도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학용어를 구사해야 하는 캐릭터도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준비한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고학력자이기 때문에 부모님은 좋아하실 것 같아요(웃음).”

배우가 신이 나서 연기하지 않으면 캐릭터가 생명력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작품에 임할 때 늘 선을 명확하게 그었다. 작품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안다. “현장에서 연기를 하다 보면 오래 묵은 변비가 한 순간 해결되었을 때 느끼는 시원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배설했을 때 드는 그 오묘한 기분, 그 맛에 영화를 하는 것 같아요.” <살인의 추억>의 터널 씬보다 더 고생하면서 <극락도 살인사건>을 촬영해서 그런지 그의 이 작품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 보인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 박해일은 조연으로 출연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좋은 연기는 진솔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작품으로 배우란 재능을 타고난 사람만 할 수 있다는 편견도 보기 좋게 날려버렸다. “전문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때 놀았던 경험이 극중에서 주어진 ‘성우’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정말 그때는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실생활 같아서 그랬을까요(웃음)? 제가 출연했던 영화 중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속편을 찍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고요.”

오래도록 사랑 받을 배우 - 박해일은 배우가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연기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늘 촬영 들어가기 전 시나리오를 철저히 연구하고 연기와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간다. “앞으로 보여줄 게 너무 많다”는 그가 지금 꿈꾸는 것은 ‘스타’가 아니라 ‘배우’다. 스스로 많은 것을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하는 그의 현명한 고집이 계속되는 한, 그는 오래도록 사랑 받을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