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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기사

이상한 나라의 박해일


<극락도 살인사건> 박해일

박해일을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배우다. 그는 이중적이다. 아니, 다중적이다. 유들유들 웃으며 다가와 능청스럽게 말을 건넬 때는 <연애의 목적>의 유림 같다가도, 사소한 농담 하나에 파안대소하는 얼굴에서는 <소년, 천국에 가다>의 13세 소년 네모의 환영이 언뜻 비친다. 엉뚱한 질문을 던졌을 때, 답변에 포함시킬 단어를 고르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에서는 <극락도 살인사건>의 진중한 청년 제우성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혹여 그가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궁리 또 궁리하면서, 그와의 인터뷰는 전전반측 예측불허로 흘러갔다. '대체 저 속에 뭐가 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그와 처음 대면한 순간부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예의 바른 멘트를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끝마치기까지, 결코 풀리지 않았다. 박해일은 여전히 모르고 또 모를 배우다. 그래서 더 파헤치고 싶고, 속속들이 파악하고 싶은 배우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막연히 품고 있던 이 공고한 선입관은, 그를 만나고 난 후에도 깨지지 않았다. 박해일은, 해일국(國)에 사는 해일인(人)이다.
text _김나영 design _박미영 photo _남성우

  관객들이 작품마다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다르게 인식해주는 건 참 고맙고 좋은 일이다. '인간 박해일'은 사실 나에게 있어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 영화마다 나의 여러 모습들이 투영되어 있지만, 관객들이 '박해일에겐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다'고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2003년, 첫 주연작인 <질투는 나의 힘>으로 영화지의 표지를 장식했을 때부터, 글과 사진을 통해 드러나는 박해일이라는 배우는 독야청청 나 홀로 내 길을 가겠노라 굳게 결심한 듯했다. "저, 지금 잘하고 있습니까?"라는 멘트를 연신 내뱉으며 카메라 앞에서 긴장했을 그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지금 카메라 앞에서 익살을 부리며 자유롭게 노니는 저 배우는 박해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해일이 사진 촬영을 제법 즐긴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은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박해일은 한결 편안해졌다.

근 4∼5년 사이에 카메라 앞에 선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 오늘 촬영, 사진 컨셉트가 좋았다.(웃음) <극락도 살인사건>(이하 <극락도>)의 이미지와 크게 동떨어지거나 이질적인 시안이었으면 촬영하기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컨셉트가 일치했다. 데뷔 초기에는 인터뷰나 사진 촬영을 본의 아니게 해야 했기에, '어떻게 하지?'라는 막막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 영화를 대중 앞에 알려야 하는 시점이 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하는 대처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시간이 나를 덤덤하게 만들어준 것 같기도 하고.
<괴물>은 이제까지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튀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가족'의 일원으로 흡수된 모습이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동안 많은 작품을 한 것은 아니지만, <괴물>은 '내가 왜 영화를 하고 있지?'라는 생각에 일종의 방점을 찍어준 작품이었다. <괴물>의 가족들이 처음 모였을 때, 나 역시 의문이 많았었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재연된 괴물의 모습보다, 가족의 모습이 더 괴물 같았거든.(웃음) 그래서 초반에는 호기심 반, 의무감 반으로 촬영에 임했다. 근데 뭐, 첫 촬영을 마치고 나니까 크게 문제 될 게 없더라고, 하하.
<괴물> DVD의 비하인드 영상을 보니까 파상풍 주사를 맞기 전에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인간적으로 느껴지더라.(웃음)
뭐, 인간적으로 보였다면 다행이다.(웃음) 내 스스로 편안한 공간이라 인식하고 난 후에는 감추고 싶은 게 없어진다. 파상풍 주사를 맞은 날이 하수구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었는데, 그때 딱 알았지. '쉽게 찍는 영화는 하나도 없구나!'(웃음). <극락도>도 마찬가지였다. 크랭크인을 한 날이 소위 '미친 날'이라 부를 만큼 기후가 오락가락했는데, 한 번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나니까 술술 풀리는 느낌이었다.
<괴물>은 미혼일 때 찍은 마지막 작품이고, <좋지 아니한가>는 결혼을 한 이후에 찍은 첫 작품이다. 스스로 마음가짐의 변화가 있었나?
연기를 할 때 결혼을 했다는 사실에 크게 구애받지는 않는다. 기혼남으로서의 일상생활이 묻어나기는 하겠지만, 청년을 연기해야 한다면 또 청년답게 할 수 있는 거고. 뭐,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앞으로는 또 모르지. 기름기 좔좔 흐르는 중년이 될지.(웃음)
특별출연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좋지 아니한가>에서 출연 분량이 의외로 많더라. 경호라의 캐릭터가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정윤철 감독님을 만나 상의를 한 뒤 출연을 결심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지만, 궁극적으로는 소통과 관련된 영화라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끼리 너무 이해하려고 들면 오히려 그게 독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경호의 캐릭터는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마도 경호가 가족 내부에 속해 있었다면 좀 더 주관적으로 접근하려고 했을 거다.
경호가 원조교제에 몸담았던 사연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자지러졌다. 역시, 관객들은 박해일의 '똘기' 있는 모습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똘기? 으하하. 신기한 표현이다.

관객들은 의외로 박해일의 순애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왠지 박해일은 순애보와 속물성 사이를 위태롭게 오갈 때 더 매력적인 것 같다.
음… 박해일의 순애보…. 한때는 관객들이 그걸 좋아했다고들 하던데?(웃음) 관객들이 작품마다 박해일이라는 배우를 다르게 인식해주는 건 참 고맙고 좋은 일이다. '인간 박해일'은 사실 나에게 있어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거든. 영화마다 나의 여러 모습들이 투영되어 있지만, 관객들이 '박해일에겐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다'고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살인의 추억>의 용의자 박현규부터 <좋지 아니한가>의 경호까지, '똘기'는 당신의 필모그래피를 아우르는 하나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똘기'를 참 좋아하시네.(웃음) <극락도>의 제우성이라는 역할도 그 '똘기'를 가지고 있다.
관객들의 환상을 100퍼센트 배반하지 않으면서도 본인의 목표에 천천히 근접해나가는 것 같다. 대중의 기대와 본인의 목표의식은 어떻게 조율하나?
그 조율이 어디 맘대로 되나?(웃음) 그냥 영화나 캐릭터에 나다운 모습이 하나라도 묻어 있으면 마음이 끌려서 하게 된다. 그런데 뭐 알아서 정리를 쫙 해주시니까, 내가 별달리 할 말이 없네.(웃음)
<연애의 목적>을 통해 배우로서의 평가는 상승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비춰지는 이미지에서는 약간의 불이익도 있었을 것 같다.
관객들이 박해일을 색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선택한 작품은 아니다. 다분히 일상적이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플롯이 재미있었거든. 영화는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하지 않나? 교사를 너무 가볍게 그려서 교권을 추락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말들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유림은 '선생님 같지 않은 선생님'으로 설정된 캐릭터였으니까.
대중들은 박해일이라는 배우에 대해 여러 가지 선입관들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렇다. 박해일은 왠지 인터뷰를 싫어하는 은둔주의자 같고, 한없이 양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뭉스러운 것 같다.
은둔주의자라기보다 작품을 통해 평가받고 싶은 바람이 있다. 인터뷰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난 오히려 인터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특히, 1대1 인터뷰를 좋아한다. 이를테면 이런 '밀실' 인터뷰 말이지.(웃음) 서로 오가는 맥주 한 잔의 여유와,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랄까?(웃음) 음… 의뭉스럽다는 표현은 어찌 보면 그게 나답다는 생각도 한다. 특별히 하나의 톤을 정해서 보여주고 싶은 건 없으니까.
2001년에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데뷔해서 <극락도 살인사건>이 장편영화로 치면 열 번째 영화다. 그런데 마치 데뷔한 지 10년이 훌쩍 넘은 것처럼 연륜이 느껴진다.
그런가? 난 항상 신인 같은데. 연륜이 있는 배우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륜이 있어 보인다는 건, 결국 매너리즘에도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거니까. 투박함을 잃지 않은 채,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작업들을 앞으로도 계속해나갔으면 한다.
스물네 살까지는 배우가 전부가 아니라 생각했지만, 20대 후반을 기점으로 이러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지 않았나. 특별하지는 않더라도 분명한 계기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라고 자신할 수 있는 건 20대까지다. 30대부터는 뭔가 하나에 집중해서 쭉 가야 한다. 나이가 든 만큼, 더 많은 책임감이 수반되는 것 아닌가. "인생은 30부터"라는 말도 있지만 말이지.(웃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스스로 부족하다 느낄지라도 하나의 끈을 잡고 계속 가야 하는 시기라는 거다.

 

이제는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의무감도 생겼겠다.
생계적인 부분을 고려하는 배분 문제가 매번 현실적으로 다가오기는 한다. 결혼을 하고 나니 이전보다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무언의 협박이 들려오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간표'를 알뜰하게 잘 짜야 한다. 결혼 전에는 여가 시간에 하염없이 알코올을 섭취한다든가(웃음),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래'하면서 뒹굴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자연스레 변화해간다. 총각일 때는 선배들이 하도 '결혼해 봐!'라고 해서 결혼했더니, 이제는 '애 한번 낳아보라'고 하더라.(웃음) 결론적으로, 일이든 생활이든 간에 일상을 누리면서, 그리고 일상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싶다.

 

출연작들을 다섯 번 이상 본다고 들었다. 볼 때마다 감상이 달라지나?
물리적으로 대충 그 정도 보는 것 같다. 집에 있을 때 TV에서 해주면 가끔 보기도 하고.(웃음) 혼자 있을 때는 집중해서 보는데, 남과 함께 있을 때는 '뻘쭘'해서 채널을 돌리게 된다. 관객의 반응을 직접 체험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화가 개봉하면 극장에 가서 반드시 한 번 이상 보는 편이다. 처음 볼 때는 내가 연기한 부분, 오로지 나밖에 안 보인다. 그때는 한없이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오르지. 하지만 감상 횟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상대 배우도 보이고, 작품의 전체적인 윤곽도 파악하게 되더라.
<질투는 나의 힘>을 다시 보니 관객 입장에서도 전혀 다른 감상이 생기더라.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현실에서 아주 동떨어진 역할은 없다. 현실성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긴장감을 형성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는 나의 힘>을 통해서는 박찬옥 감독님의 섬세한 연출력을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첫 주연작으로서 시작이 좋았다. 그 작품을 통해 인간의 감정에 대한 섬세함을 훈련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유명한 카피 문구, 4년이 지난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나도 잘해요' 말인가? 으하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원상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질투는 나의 힘>의 이원상이 도를 터득하고 <연애의 목적>의 유림이 된 거지.(웃음) 혹은 원상이 <질투는 나의 힘>의 문성근 선배처럼 변할 수도 있다. 나에게 어떠한 부분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리고 그런 부분들을 다른 누군가가 너무나 풍족하게 누리고 있다면 그 사람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건 당연하다. 그를 단순히 질투의 대상으로 여기는 건 너무 '쪼잔'하니까. 그러한 상황에서 결국은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감정을 품게 된다는 것이 <질투는 나의 힘>이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메시지였다.
원상이 아무도 없는 편집장의 집에서 소변을 본 뒤, 화장실 바닥에 흘린 소변을 휴지로 닦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변을 보는 행위는 일종의 영역 표시인데, 스스로 그것을 없애버린다는 게 굉장히 소심한 자의식의 표현인 것 같았다.
나보다 잘 사는 어느 사람의 집에 몰래 들어갔는데, 그만 화장실에 오줌을 흘린 거다. 그럼 보통 움찔하면서 바로 닦지 않나? 나갈 때도 내가 남긴 흔적을 확인하게 되고. 그건 기본적인 예의나 존중의 표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의 집에 갔더라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 장면이 참 사람의 속성을 통찰력 있게 잘 포착한 것 같다. 참고로 인간 박해일은 <질투는 나의 힘>의 이원상과는 다르다.(웃음) 나는 나에게 없는 부분을 상대방이 갖고 있다면, 그걸 잘 배워서 포착하고자 한다.
연극 <청춘예찬>은 당신이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작품일 것 같다. 봉준호 박찬옥 임순례 감독과의 인연을 만들어준 작품 아닌가.
당시 그 세 명의 감독님들은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평소에 연극을 많이 보시는 분들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들의 작품에 '청년'으로 출연할 배우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는 것.(웃음) <청춘예찬>에서의 캐릭터가 세 감독님이 영화를 통해 그리고자 했던 이미지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일상적이고 사람 냄새가 나는 연극이었기에, 영화와 접목시킬 때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셨던 것 같다.
세 명의 감독이 동시에 한 배우에게 '필'이 꽂혔다는 건 그 배우로부터 저마다 다른 면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당신은 배우로서 참 좋은 얼굴을 갖고있다.

그런가? 하지만 자기 얼굴에 만족하면서 사는 배우는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 너무 잘생겼다는 말을 듣는 게 불만인 배우들도 있다. 대부분이 자신의 얼굴에 대한 불만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외모에서 부족한 부분들을 다른 것들로 채워가는 게 배우의 본분인 것 같다.


 연륜이 있는 배우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륜이 있어 보인다는 건, 결국 매너리즘에도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거니까. 투박함을 잃지 않은 채,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작업들을 앞으로도 계속해나갔으면 한다.
 <극락도>에서 박해일은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 박해일의 섬뜩한 이면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스릴러 <살인의 추억> 이후, 그는 4년 만에 친숙하면서도 낯선 장르로, 고립된 섬 극락도로 발길을 돌렸다.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 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지만, 그 얼굴들의 한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책임감을 봇짐처럼 짊어진 박해일이 있다.

'극락도' 와 '살인사건'이라는 단어의 조합이 상당히 부조화스럽다.
맞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극락도'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건 일종의 아이러니다. <극락도>는 현실에 두 발을 모두 붙이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한 발은 땅에 붙이고 다른 한 발은 허공을 향하고 있는 작품이랄까? 그런데 그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상황들이 결국은 미스터리로 흘러간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제우성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는 톤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알리바이 부족으로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능동적으로 사건을 추적하는 인물이니까. 도저히 하나의 톤으로 갈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제우성은 능동성과 수동성을 겸비한 인물 같다. 그 또한 여성들이 가진 판타지를 일부 충족시켜주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엘리트이면서도 사회 부적응자이고, 중요한 순간에는 가끔 버럭 성질을 내는 모습이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가끔 '버럭!' 하는 걸 여자들이 좋아하나? 그거 너무 개인적인 취향 같은데?(웃음) 제우성이라는 인물의 엘리트적인 느낌은 내가 출연하면서 많이 뭉그러졌다. 으하하. 원래 좀 더 샤프한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참 아쉽네.(웃음) 역할을 맡기 전에 부담으로 다가왔던 부분들이 몇 개 있었다. 예를 들면 제우성이 S대를 졸업한 고학력자라는 거! 근데 뭐 막상 하다 보니까 우리 영화는 섬이 배경이어서 아무리 의사여도 토속적인 느낌을 더 살리게 되더라. 인터넷을 보니 <하얀거탑>이나 <외과의사 봉달희> 같은 메디컬 드라마에 이어서 <극락도>의 박해일이 의사 바통을 이어받는다는 기사도 올랐던데? 하지만 <극락도>는 살인사건이 중심이기 때문에, 의학 용어 같은 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웃음)
시나리오가 확실히 토속적이긴 하다. 제우성은 메스를 드는 게 아니라, 참기름을 바른 손으로 환자의 목구멍을 뒤지더라.
우리 영화의 분위기가 그렇다. 시간적인 배경은 1980년대고 공간적인 배경은 외딴섬이니까. 데뷔 초기에 제우성 같은 인물을 맡았더라면 연기를 하면서 너무 높은 산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2프로 부족한 상태일지라도, 한번 해볼 만하다고 느끼게 됐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구도를 그려보자면, 제우성은 꼭지점에 서있는 캐릭터다. 극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부담감도 상당했을 것 같다.
이전에도 매번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때마다 부담감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작품을 끌고 나가야 하는 입장이라서 부담이 더 컸다. 섬이라는 공간에 고립돼서 예민해져가는 사람의 심리를 복합적으로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고민 말고도, 영화를 꾸려나가면서 이기적인 나 자신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파이팅' 해야 한다는 게 큰 숙제였다. 이 영화는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대한극장 앞에서 "'범인은 절름발이다!"라고 외칠 만한 스포일러가 있는 작품이 아니다. 복잡다단한 상황과 그 상황에 처한 인물들 각각의 묘한 뉘앙스에 주목해야 하는 영화다. 등장인물이 많고, 사건이 복잡해서 관객들이 영화를 리듬감 있게 쭉 파악할 수 있을까 우려가 들기도 하지만, <극락도>는 현실적인 부분들을 원상복귀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거, 그게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촬영장소인 소흑산도는 어땠나?
소흑산도는 일본식 표현이고, 우리말로는 '가히 거주할 만한 섬'이라는 뜻의 '가거도'라 불린다. 자연의 투박함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남성적인 느낌의 섬이다. 사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스태프들이 가거도에서 촬영하는 걸 반대했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4시간이나 들어가야 하는 오지니까. 하지만 미장센 측면에서 볼 때는 가거도만 한 곳이 없었다. 감독님께서 극락도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곳이 없다고 하셔서, 우리로서는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웃음)
5개월 동안 한 공간에 갇혀 지내보니 어떻던가.
갇혀 지내다 보니 팀워크 하나는 좋았다.(웃음) 경치 좋고 공기 좋아서 하루 이틀은 극락에 온 기분이었는데, 막상 촬영에 돌입하곤 현대적이지 않은 시설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런 고된 부분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어느 순간에는 예민해지기도 한다. 섬이 원체 폐쇄적이다 보니 어디로 나갈 수조차 없으니까. 그럴 땐 보통 체육대회를 한다든가(웃음) 해산물 파티를 하면서 팀워크를 재정비했다.
<극락도>의 제우성도 그렇고 당신이 맡은 캐릭터들은 대부분 반주류이거나 혹은 모성이 결핍되어 있다. 한 번이라도 영화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연애의 목적>에서는 어머니가 있었다. 근데, 이거 별로 중요한 얘기 같지는 않은데?(웃음) 실제로는 모성의 결핍 없이 자랐다. 영화를 보고 그렇게 받아들였다니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의 그러한 모성 결핍 이미지가 여성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왠지 엄마의 역할을 대신해주고 싶은 감정이 생겨나니까.
아주 독특한 시각이다. 예리한 시각이기도 하고.(웃음)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나?
안 해봤다.(웃음) ?

<극락도>는 현실적인 부분들을 원상복귀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 영화다. 궁극적으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거, 그게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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