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해일/기사

박해일 “다시 태어나도 감정노동자 하겠다”(김범석의 완소인터뷰)

뉴스엔 글 김범석 기자/사진 이재하 기자]

박해일의 얼굴은 볼수록 오묘하다. 20평대 아파트에 효율적으로 배치된 가구처럼 어떻게 저리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균형있게 자리 잡았을까 싶다. 맑은 미소에 마음이 훈훈해졌다가도 고개 한번 숙였다 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신경질적인 표정도 나온다. 불가마와 얼음방을 수시로 오가는 변화무쌍함이라니.

한미 FTA에 대해 한 시간은 족히 연설할 것 같은 진지함과 어제 본 ‘개그콘서트’에 대해 수다를 떨어도 될 것 같은 빈틈을 겸비한 남자. CF나 예능프로와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스크린에 주력하는 모습도 박수쳐주고 싶다.

박해일에 대해 선악을 공존한 마스크니, 작두 탄 연기력 운운하며 수사를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는 그저 기본에 충실한 배우일 뿐. 노래 못하는 가수가 기교에 얽매이듯, 박해일은 정확한 딕션과 오버하지 않는 몸놀림, 심지어 주머니에 꽂은 손까지 연기하는 천상 연기자다.

그만큼 박해일은 감정을 아껴 쓸 줄 아는 똑똑한 감정 노동자다. 새 영화 ‘심장이 뛴다’(감독 윤재근/제작 오죤필름, 6일 개봉)에서도 그의 기본기는 여지없이 빛났다.

★ 휘도는 가장 가방끈 짧은 인물

-아직도 담배를 피우다니. 강심장이다.
“던힐 레드를 좋아한다. 아들도 생겼고 이제 줄여야 하는데 그게 마음 같지 않다.”

-‘심장이 뛴다’는 현실에선 전혀 공통분모가 없을 것 같은 두 남녀가 대립하는 얼개다. 청담동 영어유치원 원장과 유흥업소 언니들을 상대하는 ‘콜떼기’의 스파크. 일단 신선하다.
“심장은 하나이고 살려야 할 사람은 둘인데 양지와 음지에서 사는 두 사람이 그 심장을 놓고 싸운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스파크가 튀는 지점이다. 내가 맡은 양아치 휘도는 데뷔 후 가장 가방끈이 짧은 친구이지 싶다.(웃음) 그래서 연기하는데 아주 편했다.”

-처음 감독과 만난 순간을 기억하나.
“시나리오를 읽은 뒤 감독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더라. 알아보니 ‘선물’ 오기환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었다. 정확히 2009년 12월 31일 서울 강남 도산공원 앞에서 보자고 약속했다. 청재킷을 입은 분이 저쪽에서 걸어와 한 눈에 알아봤다. 나도 혼자여서 마치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주쳤다. 커피를 5잔이나 리필해가며 영화에 대해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이끼’ 마무리한 뒤 작년 여름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콜떼기'란 은어는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해봤나.
“콜떼기, 또는 콜뜨기라고도 부른다. 자가용 영업을 뛴다에서 파생된 것 같다. 아니면 코를 뜨다에서 온 말 같기도 하고. 내가 국어학자가 아니라서.(웃음) 가오 때문에 보통 외제차를 몰지만 나처럼 국산 중형차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자식을 버리고 재혼해서 잘 살고 있는 엄마를 증오하는 아들. 하지만 그녀의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아들의 심박수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고 병원에선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하지만 아들 눈에 엄마의 미세한 손떨림이 포착되고 희망을 놓지 않는다. 속사정도 모르고 덜컥 장기 기증 동의서에 사인한 걸 원망하면서 모든 걸 돌이키고 싶은 남자의 고군분투가 펼쳐진다.”

★ 김윤진 집중력 보고 놀랐다

-김윤진씨가 박해일 때문에 출연했다며 무한 신뢰를 보였다.
“김윤진 선배님과 처음 연기했는데 순간적으로 감정을 불어넣었다가 확 빠지는 걸 보며 여러 번 감탄했다. 나한테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밀애’ ‘세븐데이즈’ ‘하모니’를 보면서 느낀 건데 독보적인 색감의 배우란 걸 새삼 깨달았다. 6년 반 동안 '로스트' 시리즈에 출연한 것도 쉽지 않은 선택일 텐데 확실히 다른 여배우와 차별점이 많은 분이셨다.”

-평소 관객들에게 바라는 점이나 아쉬운 점은 없나.
“극장에서 상영되는 순간 영화는 더이상 내 것이 아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뭔가 느끼시길 바라지만 그걸 요구하는 순간 왠지 그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아 조심스럽다.”

-집에선 효자인가.
“되게 평범했다. 초등학생일 때 편도선 수술을 해서 부모님이 공부 보다는 건강하게 크길 바라셨다. 극장에 모시려고 해도 잘 안 오신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때 딱 한번 VIP 시사회에 오셨다.”

-요즘 고민은 뭔가.
“좀 바쁘게 살고 싶다. 안 해본 장르도 찾아다니며 도전해볼 생각이다. 일본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을 좋아하는데 그가 연출한 ‘안경’이나 ‘카모메식당’ 같은 영화도 꼭 한번 출연해보고 싶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발 닦고 맥주 한잔 마시며 보기에 최고다. 안구 정화, 마음 정화가 동시에 된다.”
그는 '극락도 살인사건'의 김한민 감독의 차기작 '활'에 출연한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사극으로 류승룡과 호흡을 맞춘다.

★ 희망은 가끔 사람을 속여

-새로 재미 붙인 취미는.
“작년 11월부터 자전거를 탄다. 집이 천호동 쪽인데 미사리까지 다녀오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봉준호 감독이 자전거 멤버다. 사회인 야구팀에서 야구도 꾸준히 한다. 골프는 아직 배울 기회가 없어서 채를 잡아본 적이 없다.”

-겨울 극장가가 ‘라스트 갓파더’ ‘황해’ ‘헬로우 고스트’ 삼파전 양상이다. 자신 있나.
“까봐야 아는 거 아닐까. ‘황해’처럼 빅 버짓 영화도 있고, 코미디도 있으니까 우리처럼 정통 드라마도 승산 있다고 본다. 뭐든 다양한 게 좋은 거 아닌가.”

-생후 5개월 된 아들은 누굴 닮았나.
“아직 누구도 닮지 않았다.(웃음) 서서히 바뀌지 않겠나. 분만실에 같이 있었는데 탄생의 순간이란 게 참 숙연하더라. 그래도 희한하게 눈물은 안 났다.(웃음)”

-인터넷에서 보니까 ‘젊은 하루’라는 시를 좋아한다고 돼있던데 사실인가.
‘그대 아끼게나 청춘을/이름없는 들풀로 사라져 버림도/영원히 빛날 삶에 환영도/젊은 시간에 쓰임새에 달렸거니/오늘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젊은 하루를 뉘우침없이 살게나. (’젊은 하루‘ 유달영)

“연극 ‘청춘예찬’으로 유명해지기 전 어느 더운 여름날, 서울 안국동에서 열심히 포스터를 붙이고 에어컨 있는 백상 기념관에 들어갔다가 그 시를 처음 봤다. 당시 불투명한 미래와 왠지 모를 암울함 때문에 하루하루가 버거웠는데 그 글을 보고 큰 용기를 얻었다. 살면서 중요한 건 희망 보단 용기인 것 같다. 왜냐하면 희망은 가끔 사람을 속이지 않나.”

김범석 kbs@newsen.com / 이재하 rush@newse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