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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기사

박해일이 추천하는 취향을 넓혀준 영화들



박해일이 추천하는 취향을 넓혀준 영화들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이긴 한데 어떤 거창한 테마로 포장하진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런 건 별로 안 좋아해요." 고르느라 밤에 3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고 말하며 다섯 편의 영화 목록을 건네주던 박해일은 특유의 낮은 목소리 그대로 담담하게 부탁했다. 조곤조곤한 태도와 손에 들린 수첩에 적힌 정말 하나의 테마로 모으는 게 불가능한 스펙트럼의 영화들. 이 일회적 풍경은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충무로에서 다양한 역할로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어떤 흐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실 외모적으로만 따진다면 박해일에겐 과거 아이스크림 CF에서 학생들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짓는 순박한 총각 선생님이 가장 어울려 보인다. 밝지만 눈부시지 않고, 순박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하지만 결코 드라마틱하지 않은 그 이미지 덕분에 그는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함을 획득하게 됐다. 그리고 임순례, 봉준호, 한재림 등의 개성 있는 감독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캐릭터를 박해일의 백지처럼 희고 모호한 얼굴에 덧입히며 [와이키키 브라더스], [살인의 추억], [연애의 목적]처럼 흥미로운 텍스트를 완성시켰다. 말하자면 그는 뚜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신만이 가능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토록 해맑은 얼굴로 취조실 조명에 얼굴을 비추는 연쇄살인 용의자 박현규([살인의 추억])를 떠올려 보라. 차분한 외모 뒤에 느껴지는 희미한 섬뜩함은 오직 박해일이기에 표현 가능한 영역이다.

원작 웹툰의 팬들에게 싱크로율 백퍼센트라는 찬사와 함께 영화 [이끼]의 유해국 역할로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그에게 있어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단일한 이미지로 수렴되지 않는 모호함 가운데 다양한 역할을 자신 안에 담아냈던 이 배우는 그 모든 걸 "아주 조금씩이라도 축적하며" 자기만의 얼굴을 조금씩 새겨갔고, 이제 모두가 그의 역이라 말하는 옷을 입고 [이끼]라는 대형 프로젝트의 타이틀롤을 맡았다. 하여, 이제 다시 그가 담담한 태도로 건네주던 영화 목록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이 배우가 서서히 축적하며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온 경험의 조각들을.

 

 위근우 <10 아시아> 기자 사진제공  채기원<10 아시아> 기자

박해일의 첫 번째 추천 :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박해일:  [파니핑크]로 유명한 도니스 도리가 찍은 작품이에요. 비록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독일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도 따로 찾아서 보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영화죠. 영화 속 노부부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아내 트루디(한넬로르 엘스너)는 사실 아픈 몸을 숨기고 있어요. 남편 루디(엘마 웨퍼)는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트루디가 바라는 여행과 모험에 인색하고요. 하지만 결국 아내와 사별하게 되자 루디가 직접 아내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하던 일본에 가 그녀의 바람을 대신 이뤄주는 이야기에요.

 

영화설명: 원제와는 거리가 멀지만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란 제목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기막히게 표현한다. 얼마 허락되지 않은 시간 동안 남편 루디(엘마 웨퍼)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어하는 트루디(한넬로르 엘스너)와 그런 사실을 모르다 트루디의 죽음 앞에서 후회하는 루디에게 얼핏 남은 것은 후회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루디는 아내와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직접 일본에 가서 일본 전통 무용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 설명적이지 않게, 하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드러난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 : Cherry Blossoms - Hanami] | 2008년 | 도리스 도리

박해일의 두 번째 추천 : 기쿠지로의 여름

박해일:  더운 여름이라 시원하게 보시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추천하는 영화에요. 여름방학이 되자 멀리 돈 벌러 나간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나는 마사오(세키구치 유스케)와 그의 보호자 역할로 따라가는 전직 건달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가 그 여행의 과정을 통해 서로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내용인데 기타노 다케시가 만든 영화답지 않게 상당히 대중적이고 행복한 느낌의 작품이죠.

 

영화설명: 기타노 다케시가 언제나 [키즈 리턴]이나 [소나티네] 같은 영화만 만들어줬으면 싶었던 사람들에게 [기쿠지로의 여름]은 당황스러운, 하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작품일 것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모티브에 철없는 건달이란 동행자를 붙인 이 작품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이 건달과 제법 조숙한 9살 소년의 교감을 정감 있게, 하지만 느끼하지 않게 풀어내며 과격하지 않은 휴먼 코미디에도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기쿠지로의 여름 : Summer Of Kikujiro] | 1999년 | 기타노 다케시

박해일의 세 번째 추천 : 타인의 삶

박해일:  이 영화도 국내에서 특별히 흥행은 못했지만 적어도 본 사람들에게는 많은 호평을 받은 작품이에요.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에서 일반인들을 감시하는 비밀경찰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이 냉혈한이 자신이 감시하던 극작가와 여배우의 삶에 동화된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결국 이 비밀경찰은 자신이 여태 신념을 가지고 해온 행동을 회의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인간적인 삶을 원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감시하던 이들을 도와주게 되죠. 심지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그런다는 점이 상당히 감동적이에요.

 

영화설명: 영화의 제목은 [타인의 삶]이지만 결국 이 영화는 어떤 의심도 없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던 비밀경찰이 타인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찾는다는 이야기다. 도청을 비롯해 타인의 삶을 감시하는데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던 비즐러(울리쉬 뮤흐)는 당대의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여배우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를 감시하다 그들의 사랑과 열의를 접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말하자면 그 이후 비즐러가 그들을 위해 스스로의 출세를 포기하는 건 결국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타인의 삶 : The Lives Of Others] | 2006년 |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박해일의 네 번째 추천 : 컨트롤

박해일:  70년대 후반 등장했다가 보컬 이언 커티스의 자살과 함께 단 2장의 음반을 남기고 사라진 전설적 밴드 조이디비전에 대한 영화에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언 커티스에 대한 영화죠. 조이디비전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게 된 그가 발작 증세 때문에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면서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죠. 하지만 그 과정을 너무 극적으로 보여주지 않아 더 좋은 거 같아요.

 

영화설명: U2의 보컬 보노는 조이디비전의 음악에 대해 "그들보다 더 어두운 음악을 찾는 건 어렵다. 그들의 이름, 그들의 가사, 그리고 그들의 보컬은 당신이 하늘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어두운 구름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런 조이디비전의 성격은 자기파괴적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보컬 이언 커티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컨트롤]이 흥미로운 건, 이 요절한 천재에게 후광을 덧입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자신의 가능성을 결국 다 꽃피우지 못한 어떤 아티스트에 대한 아쉬움을 보여줄 뿐, 굳이 우상화하지 않는다.

 

[컨트롤 : Control] | 2007년 | 안톤 코르빈

박해일의 다섯 번째 추천 : 경마장 가는 길

박해일:  이 영화에서 문성근 선배의 속물적이면서도 고뇌하는 지식인 연기는 정말 최고죠.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시간 강사를 하는 R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아내와 가족에게 환멸을 느끼고 프랑스에서 동거하던 여자 J(강수연)와의 육체적 관계에 집착하는 모습이 정말 리얼해요. J와 함께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그녀가 배반하자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는 과정도 숨이 막히고요.

 

영화설명: 어쩌면 장선우는 홍상수보다 먼저 성이라는 코드를 통해 한국 지식인의 속물성과 자의식을 비꼰 감독일지도 모르겠다. 하일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그는 자의식 충만한 지식인인 R(문성근)이 J(강수연)와의 육체적 관계에 매달리는 모습과 그런 R을 이용해 신분 상승을 꾀하는 J를 통해 남녀 관계와 지식인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담아냈다.

 

[경마장 가는 길 : The Road To Race Track] | 1991년 | 장선우

 

"이번 작품 이후 조금은 발전할 거 같다" 

 

"그럼 내가 연기하면 다 유해국이 되는 건가? 그건 또 아니잖아요." 앞서 [이끼]가 박해일에게 하나의 전기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은 도전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원작의 캐릭터와 너무나 닮았다는 사실은 자칫 그 이미지에 기대는 안일한 연기로 배우를 이끌 수도 있다. 때문에 그는 모두가 자신과 닮았다고 말하는 그 캐릭터에 플러스알파를 더하기 위해 스스로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끼]의 유해국이 지하실 비밀 통로를 열며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빛을 빛낼 때, 박해일은 모두가 기대했던 딱 그만큼의 선을 넘어 캐릭터의 복사물이 아닌 배우 박해일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는 새로운 무언가를 담아내고 싶은 재능 있는 감독들에게 종종 부름을 받을 것 같다. "이번 작품 이후 조금은 발전할 거 같다"는 그의 담담한 예상을 듣는다면 더더욱.